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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성지순례, 그 탄생과 변질

by Emeth Media 2024. 2. 4.

콘텐츠 투어리즘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 애니메이션 성지순례를 빼놓을 수가 없다. 특히 일본에서는 아니메 성지순례(anime Pilgrimage)로 불리며, 책과 가이드북 여행패키지 등으로 소개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애니메이션 팬들은 주인공이 사는 세계에 들어가 공감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애니메이션 성지순례가 열풍이 된 것은 2000년대 후반이다.

 

 

아니메 성지순례

아니메 성지순례란 애니메이션 작품의 무대나 작품과 관련된 곳이며, 애니메이션 팬들이 가치를 인정하는 곳을 말하며, 이를 방문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애니메이션 작가가 살거나 머물던 집이나 기념관, 시설 등도 포함된다. 이러한 곳을 방문하는 사람을 아니메 순례자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순례'는 중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성지를 직접 찾아가는 체험활동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기독교인에게 예루살렘이나 로마는 종교적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그 가치가 높다.

 

기독교인은 오래 전부터 성지순례를 다니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 애니메이션, 소설 등이 팬덤을 형성하면, 그 무대나 캐릭터 관련 시설 등은 팬들에게는 일종의 성지가 부상한다. 이러한 팬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곳을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행위를 비유적으로 '순례'라고 부른 것이다.

 

 

애니메이션 성지순례의 탄생

이러한 콘텐츠 성지순례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사회현상으로 일어난 것은 1990년대 중반이었으며, 애니메이션에서는 1990년대였다. 애니메이션은 현실과 떨어진 판타지나 우주와 미래사회를 그리는 픽션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을 제외하고 현실세계와 연결된 스토리는 그 배경무대가 등장하며 팬들에겐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우선 성지순례는 영화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 1980년대 초반 오바야시 노부히코(大林宣彦) 감독의 '오노미치'(尾道) 3부작의 무대인 히로시마 오노미치시에 관광객이 몰려든 사례를 꼽을 수 있다. 오노미치시라는 시골마을을 찾자온 방문객은 1984년에 20만명에 이르렀다.

 

방문객이 급증하자 오노미치시는 적극적인 홍보활동과 유치활동을 추진했다. 이러한 오노미치시의 정책적 대응은 지자체에 필름 커미션을 낳는 계기를 되었으며, 성지순례의 발단이 되었다. 오노미치시는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 촬영지, 애니메이션 배경무대로 이용되면서 전국적으로 인지도가 높아졌다.

 

애니메이션에서는 1990년대에 열풍이 불었다. 대표적인 사례를 몇가지 소개한다. 우선 1991년에 나온 만화 '궁극 초인 아~루'(究極超人あ〜る)이다. 이 작품은 2012년 11월까지 누계 430만 부가 발행되었다. 이 작품은 배경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팬들이 성지를 만들었다. 반면 1992년에 시작된 애니메이션 '천지무용'(天地無用) 시리즈는 배경무대뿐만 아니라 캐릭터와 지명까지 사용해 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들 작품에 기반한 성지순례는 미디어가 중요한 기여를 했다.

 

 

1992년부터 연재가 시작된 '미소녀 전사 세일러문'(美少女戦士セーラームーン) 시리즈는 사회현상으로 발전했다. 이 시리즈는 누적 발생부수가 4,600만 부에 이르며, 애니메이션은 미국 등 전세계 40개국에서 방송되었다. 한국에서는 '달의 요정 세일러문'으로 소개되었다. 이 시리즈는 타깃인 여자 어린이뿐만 아니라 폭넓은 연령층에서 팬덤을 형성했으며, 관련상품도 크게 인기를 끌었다.

 

캐릭터 상품은 1,200종에 이르렀으며, 1992년부터 5년간 총매출은 1,000억 엔을 돌파했다. 이 작품의 무대는 판타지 장면을 제외하면 대부분 도쿄 미나토구 아자부주반(麻布十番) 주변이다. 팬들은 무대를 찾아나서면서 '성지'로 변했다. 팬들은 성지순례에 나서자 이를 돕기 위한 성지순례 지도도 만들어졌다. 

 

 

MZ세대를 성지순례에 나서도록 이끈 작품은 2007년 방송된 '럭키☆스타'(らき☆すた)이다. 이는 고등학생의 일상을 그린 네 컷의 코미디 만화였지만, 애니메이션으로 방송되면서 더욱 인기를 끌었다.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 한국에서도 방송되었다. 작품의 무대는 도쿄 근교 사이타마 쿠키시(久喜市)이며, 이곳에 실재하는 고등학교를 무대로 삼았다. 애니메이션이 방송되자 많은 팬들이 쿠키시에 몰려 들었고, 이는 미디어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애니메이션 산업의 변화와 성지순례

한편 애니메이션 성지순례는 경제효과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지자체는 오래전부터 주목해 왔다. 지자체는 성지에 방문자를 늘리고 지역 자원에 대한 관심을 높이며 지역에서 소비를 늘리기 위해 주변 관광지와 권리자, 지역산업, 지역언론, 인플루언서 등과 제휴해 진흥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성지순례가 확대된 것은 애니메이션 산업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200년대에 일본 지상파방송에서는 심야시간대에 애니메이션 편성을 크게 늘렸다. 이는 젊은층의 주목을 받았다. 일본에 지상파방송은 공민영 6사이기 때문에 애니메이션 신작은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제작사의 역량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겼으며, 애니메이션 제작사에겐 부담이 커지기 시작했다. 제작사로서는 애니메이션의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배경을 일일이 제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에 짧은 시간에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실재하는 거리를 그림파일로 전환한 뒤, 애니메이션 제작에서 사용하는 기법이 도입되었다. 제작비를 억제하고 제작기간도 단출하기 위해 실재하는 거리나 시설을 모델로 삼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예상외의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지역 제작회사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지역에 뿌리는 둔 제작사도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해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애니메이션 제작은 도쿄와 오사카뿐만 아니라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은 다시 부흥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아가 2010년 이후에는 OTT서비스의 보급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성지순례의 변질: '만들어지는' 성지에서 '만드는' 성지로

팬들에 의해 만들어지던 성지는 경제적 목적을 가지고 만드는 성지로 변질되고 있다. 2010년대에 성지를 만들어 내기 위한 작업도 시작되었다. 우선 지자체는 예산을 투입해 애니메이션 성지순례를 노린 기획상품을 개발하고 안내책자와 표시판도 제작했다. 또한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번역과 통역도 추가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니메투어리즘협회'(アニメツーリズム協会)가 2016년 9월에 설립되었다. 이 협회는 출판사와 지자체, 관련 기업과 단체 등이 정회원으로 참가했다. 이 협회는 2018년부터 매년 '방문하고 싶은 아니메 성지88'(訪れみたい日本のアニメ聖地88)을 선정해 발표하고 있다.

 

 

선정기준은 일본 국내외 애니메이션 팬들을 대상으로 투표를 한 뒤, 권리자와 지자체 등과 협의를 거쳐 협회 이사회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해 결정한다. 후보는 팬들에게 일정한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애니메이션의 무대이며, 시설이나 이벤트도 대상에 포함된다. 관광을 통한 지역발전이 가능한 지역이나 작품을 선정한다.

 

인기 애니메이션의 무대를 방문해 주인공의 세계관을 체험하고 공유하는 애니메이션 투어리즘. 그러나 최근에는 자자체의 뜨거운 관심과 함께 관광진흥의 중요한 수단으로 변하고 있다. 현재 일본 지자체에서는 성지순례를 내세워 관광객 유치경쟁을 벌이고 있다. 팬덤에 경제적 목적과 정책적 의도가 결합되면서 애니메이션 성지순례는 변질되고 있다.